기다림
그 날도 나는 이제 막 3살 된 지훈(가명)이를 데리고 산보를 하였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떨어진 나뭇잎을 느끼게 해 주고, 연못 속의 물고기도 보여 주다 보면 저 멀리 멍멍이가 나타난다. 그러다가 유모차에서 내리면 공을 준다. 공을 ‘뻥’ 차라고 말해 보지만 아직 나이어린 지훈이는 먼지 묻은 공을 품에 안는다. 그러다가 땅에 기어가는 개미들을 보고,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고….

시계를 본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B를 위한 기도가 흘러나온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오늘따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아내와 함께 8개월가량 성경을 공부해온 A족 여학생 B. 이제까지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자기 민족의 언어로 성경을 읽는 것에 흥미를 보였던 그녀. 눈에 맑은 이슬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정말 B가 예수님을 믿은 것일까?

그랬다. 아내가 예수 영화를 보여주고 복음을 설명했을 때 B가 눈물을 흘리며 믿는다고 했단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순간이건만, 아내는 어리둥절해서 믿어지지 않았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무슬림들이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경의 진리가 바로 이 부분이다)’이시며 그 분이 너의 죄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느냐?”고 다시 한 번 묻자 B는 결연한 목소리로 믿는다고 고백했다.

그날
그렇지만 우리는 그녀에게 당장 예수님을 영접케 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영화를 보고 난 감동 때문에 나온 반응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정말로 구원의 확신을 갖고 한 고백인지 알기 위해 며칠 후 다시 확인키로 하였다. 

영화를 본 날은 금요일이었고, B는 주말을 보내기 위해 학교를 나와 엄마와 언니, 오빠와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종교적 열심이 강한 가족과 지내면서 과연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변치는 않을지 약간 불안하기도 하였다. 차라리 그 때 영접 시켰더라면 그 경험으로 인해 그녀의 마음이 확정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음 월요일은 시험이 있어서 오지 않았다. 조금 더 불안해졌다. 

이튿날, 다시 찾아온 그녀에게 신구약 전체를 정리한 또 한 편의 비디오를 보여준 후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겠다고 하였고, 자기들의 민족어로 된 영접기도문을 따라 했다. 또 한 번 그녀의 눈시울이 붉혀졌다. 

할렐루야! 우리의 기도,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 받은 날이었다. 그 땅은 넓지만 척박한 땅이었다. 믿는 이들이 생명수를 전하고 있지만 그곳을 촉촉이 적시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많이 걸었다. 때로는 혼자서, 가끔은 아내와 함께 이곳저곳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하는 영혼이 분명히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렇지만 나의 시간 중 많은 부분은 아들 지훈이와의 산보로 이루어졌다. 아내가 B와 성경공부를 할 때 아이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데리고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1주일에 적어도 4-5시간, 기본적으로 6-7시간은 전적으로 내가 아이를 돌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집중해서 친구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가정
어떻게 보면 나의 주 사역은 ‘아이 돌보기’가 되었다. 아내가 하는 사역에 내가 보조 사역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 가정이 함께 하는 사역이며,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 그리고 남편과 아내의 하나된 비밀과 성경에서 말하는 가정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가부장적 권위의식과 남존여비 사상에 사로잡혀 아름다운 가정의 모델을 찾기 힘든 현지인들에게 도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선교사로서 살아가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몸 된 가정으로 살아간다. 남편은 머리로서, 그리고 아내는 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것은 주종(主從)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유기체’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계급적 조직체’가 아니다. 남편의 머리됨도 그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며, 아내의 몸 됨도 그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유기체의 각 부분은 역할과 기능이 모두 다르지만, 높고 낮음이 없으며 한 몸으로 살아간다. 이런 유기체적 관계는 생명과 함께 지속된다. 

‘계급적 조직체’는 인간적인 철학과 사상 그리고 그 시기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진다. 따라서 시대마다 변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유교사상은 군신(君臣)관계를 강조하고, 여인들에게는 ‘삼종의 도’(三從之道: 결혼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하면 남편을 따르고, 늙으면 아들을 따르는 여인의 도리)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철학과 사상이기에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도 이와 비슷한 사고방식이 많다. 현지인들이 가끔씩 나에게 아내를 얼마에 얻었느냐고 묻곤 한다. 신랑 쪽에서 지참금을 주고 아내를 데려오는 이 지역 풍습에 기인한 것이다. 또 남자들끼리 이야기하다가 “자네 공처가 아냐?” 라는 말을 하면서 즐거워 하곤 한다. ‘공처가’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의 70년대에 유행하던 말이었던가? 그만큼 이 사회에서 아내들의 지위가 낮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회이기에 더더욱 성경에서 말하는 가정의 비밀을 전하고 싶었다. 

결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내가 나에게 저녁에 함께 기도시간을 가질 것을 제안했다. 남편인 내가 먼저 말했어야 할 내용이었다. 당연히 동의하고 그 날부터 우리는 참으로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읽기로 하였다. 말씀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또 주변의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 우리 가정의 저녁 시간은 그렇게 은혜로 채워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첫 아이가 태어나자 그렇게 좋았던 저녁 성경읽기 시간은 흐지부지 되었다. 아이 양육이 우선순위가 되었던 것이다.

예배하는 삶
최근에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한 선배님을 만났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두 자녀가 있는데 가족 모두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20분간 성경을 읽고 나누며 교제한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서 가족 간의 사랑과 하나됨이 더욱 굳건해졌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 가정에 결여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으로서 드리는 소중한 예배를 이제 다시 회복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렇다. ‘예배’다. 이것은 우리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예배자로 삼으셨다. 이 예배는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에서 시작되지만 가정에서 무르익고 교회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것(로마서 12:1), 우리의 모든 시간과 재물과 심지어 인생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예배가 된다. 

가정 안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난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하면 그것을 보는 존재가 셋이 있으니 하나님과 아내와 자식이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그 24시간 중 나의 삶은 모든 영역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세월이 합쳐지면 그 깊이까지 파헤쳐진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을 배우는 사람이 있으니 자식이다. 어른들의 모든 동작과 말을 흉내 내는 자식을 앞에 두고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삶이 예배하는 삶이라면,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아버지로서 살아간다면, 매일 자녀들과 함께 주의 도를 묵상하고 적용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면, 자녀들도 예배자로서 설 것이다. 그럴 때 영적인 자녀들도 예배자로 설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인생을 드리는 예배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으로서 나아간다. 가정을 통해 몸 된 교회의 비밀을 드러내고자 한다. 주님을 섬기는 가정을 통해 주님이 머리 되시는 교회를 일으키고자 한다. 그것이 우리 가정의 삶과 사역의 목표이다.

지훈이 아빠 | 중국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