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스를 보고 있으면 세상이 다 무너질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이웃이 이웃을 해하면서 아귀처럼 달려들고 도둑처럼 엿보고, 심지어 아무 안면이 없는 이들에게 거침없이 분노를 쏟아내는 악에 받친 사람들의 고함이 세상에 가득하다. 비도덕과 불법이 난무하는 세상 이야기에 차라리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경제발전을 위해 청춘을 희생하고, 가족이 등 따습고 배부를 수 있도록 허리띠를 졸라매고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들. 반세기만의 노력으로 우리 경제는 풍요롭고 다양하며 여유로워졌다. 그러나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한 ‘우리’는 괴리감과 상실감에 몸서리를 치고 현실 곳곳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에 자신감을 잃고 자발적 사회 외톨이가 된다. 이렇게 가정과 사회, 어느 곳에서도 위로받지 못해 병적으로 민감해진 ‘우리’가 특정 혹은 불특정 대상에게 가슴 속의 ‘노’를 폭발하게 되는 것은 분명 예견된 결과였으리라. 이러한 ‘우리’에게 사회는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라고 진단한다.
우리는 화가 날 때 “가슴이 답답하다”, “울화통이 터진다”라고 말한다. 국어사전에 ‘화’는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생기는 노엽고 답답한 감정을 말하며 ‘울화’는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여 나는 화, ‘울화통’은 몹시 답답하거나 분한 마음이 쌓이고 쌓인 것이라고 각각 정의한다. 그러고 보면 스트레스가 쌓일 때 머리를 쥐어짜는 사람은 있어도 가슴을 부여잡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화는 가슴이 느끼고 스트레스는 머리가 느끼는 가 보다. 화를 낸다는 의미의 ‘분노(愤怒)’에도 마음 심(心)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화’는 역시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말이 맞다. 그러면 분노를 조절하는 기능은 어디에서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이성, 생각일 것이다. 냉철하고 분명한 생각이 있다면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려는 분노를 잘 제어할 수 있을 것이므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은 뇌(脑)가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생각은 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생각을 한다고 한다. 한자 ‘생각 사(思)’는 원래 정수리를 나타내는 신(囟)과 마음 심(心)이 만든 글자로 머리와 마음이 공동작업을 통해 생각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생각 상(想)’자나 ‘생각할 려(虑)’ 역시 글자에 마음 심(心)이 들어있다. 맹자는 “心之官则思”(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孟子•告子上》)라고 하여 생각할 때 머리와 마음이 함께 일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분노 조절은 마음과 생각을 바르게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6장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아신다고 하셨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인간. 그래서 상처를 받을 때, 마음이 아프고 적절한 위로를 받지 못할 때 분노로 분출하게 되는 나약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절실한 까닭이다. 새해다. 1년의 계획을 세우고 어제보다 나은 나를 기대하며 새로운 결심(决心)을 한다. 그리고 두손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 주여. 새해엔 서로를 돌아보며 사랑하게 하소서. 분노의 마음(怒)을 품기보다 사랑의 마음(爱)을 품게 하소서. 아쉬워하며 안타깝게 보내야 했던 지난해보다 새해엔 조금 더 평안하고 안전하게 하소서. 모든 사람들이 어려움 없이 편안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게 하소서. 태평성세 되게 하소서. ▤ ♣ 박애양 | 중문학 박사
|